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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king in the Light https://kuw.bis.mybluehost.me Christian thought 크리스천으로서 세상을 보는 눈 Sat, 22 May 2021 11:56:03 +0000 en-US hourly 1 https://wordpress.org/?v=7.1 https://kuw.bis.mybluehost.me/wp-content/uploads/2020/08/cropped-logo2-top-1-32x32.png Walking in the Light https://kuw.bis.mybluehost.me 32 32 한강공원 의대생 사건 https://kuw.bis.mybluehost.me/college-students-death/ Wed, 19 May 2021 03:39:04 +0000 http://www.walkinginthelightblog.com/?p=2547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으나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도저히 그 사람들을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예를 들어 친구와 내가 단둘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조금전까지 건강했던 사람이 쓰러져 죽음을 맞이 했다거나, 내가 우연히 혼자 있던 상황에서 절도사건이 일어났다고 생각해보자. 모든 의심의 눈초리와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경우 억울한 ‘나’를 내세워 오히려 상대방을 감정적으로 비난하거나, 상대방의 의심 어린 질문 하나하나에 반박을 늘어놓으며 상대의 헛점을 짚어 자신의 논리를 세워 나갈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어떠한 의심도 깨끗하게 해결되지 못한 채, 감정적인 상처들만 남게 되는 쓰라린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 속에서는 이와 다른 접근 방식을 가르쳐주고 있다. 사도행전 11:4의 말씀에서,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 고넬료의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로 사도들과 형제들에게 비난을 들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주신 감동대로 열심히 사역을 담당한 것뿐이었으니 얼마나 억울했을까? 하지만 이에 대해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입니다!’라며 자신의 주장을 펼치거나, 어떠한 변명이나 논리를 세우지 않았으며, 감정적으로 호소하지 않고 상대를 비난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가 한 것은 이 것이었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아마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일어난 그대로의 일들을 자신의 주장이나 해석을 제하고 있는 그대로 빠짐없이 진심을 다해 설명하였을 것이다. 삿대질하던 유대인들은, ‘그들이 그 말을 듣고 잠잠하여’ 분노가 가라앉고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분명 아직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당시 금기시되는 것이었으므로, 이에 대해 끝까지 옳다, 동의한다 하지는 않았지만 ‘잠잠해졌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떠한 경우에는 우리가 누군가를 끝까지 설득할 수 없거나 어쩌면 그럴 필요가 없을 때도 있다. 이 세상의 일들, 특히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일들을 우리가 어찌 모두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 때는 베드로처럼 그저 있는 그대로의 일을 ‘차례대로’ 설명하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른다.

진실은 차례대로 있는 그대로의 것이다. 진실은 말하는 자를 담대하고 떳떳하게 한다. 진실은 힘이 있어 듣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진실은 투명하고 아름답다. 진실은 의문을 낳지 않고 듣는 이를 잠잠하게 한다. 진실은 싸움을 그치게 하고 평화롭다. 진실은 거짓의 어둠을 뚫는다.

한강에서 실종되어 주검으로 돌아온 손정민군의 사건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모든 비난과 의심의 화살을 맞고 있는 그 사람이,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진심을 다해 차례대로 설명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경찰에게, 변호사를 통해 언론을 통해 이렇게 대응하지 않아도 정민군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처럼 최선을 다해 그 목소리를 듣고, 또 들어주었을 것 같다. 끝까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이 사건을 지켜보는 모두가 잠잠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처음, 실수로 신발을 버렸다 한들, “제 신발이 실종된 친구를 찾는 단서로 중요한 것이었나요? 버렸지만 당장 찾아오겠어요. 어디로 갔든지 어떻게 해서라도 꼭 찾아서 드릴게요…” 죽은 아이의 아버지는 이러한 대답을 바라지 않으셨을까?

실종된 친구를 찾아 전단지를 만들고, 배너를 붙이고, 함께 있었던 곳을 함께 찾고 뛰어다니며, 실종된 친구가 한강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을 때 누구보다 슬퍼하고, 누가 몇 번이고 같은 것을 물어보아도 차례대로 있는 그대로를 진심으로 말해주고, 장례에 끝까지 함께 있어주며 자신에게 쏟아지는 오해와 의심의 눈길에도 당당하게 맞섰다면 보는 이들이 오히려 이 친구를 통해 위로를 받고 진실이 무엇인지 가슴 절절히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실종되어 죽은 것은 정민이만이 아니었다. 친구와 그 가족으로서, 외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부모에게 당연하게 해야 하고 보여주어야 했던 가장 중요한 ‘말과 행동’이 함께 실종되었고, 싸늘한 주검이 되어 우리들에게 돌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함께 절망하고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차례대로 설명되지 않으며 이상하리만큼 차가운 그들의 행동에 대한 본능적인 반감일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진실’만은 그 어딘가에 영롱한 빛을 내며 모두가 찾아 주길 기다리고 있기를… 정민이가 자신이 실종되었던 부근에서 평생 자신을 찾아 헤맬 뻔했던 부모의 품으로 돌아와 주었듯이 말이다. 정민이를 찾아주었던 오투처럼, 차종욱 민간구조사 처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약한자를 들어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이 일에 자신의 일처럼 가슴 아파하는 이름모를 사람들을 통해 분명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실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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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 https://kuw.bis.mybluehost.me/%eb%b0%98%eb%93%9c%ec%8b%9c-%ea%b7%b8%eb%9e%98%ec%95%bc%eb%a7%8c-%ed%95%98%eb%8a%94-%ea%b2%83/ Sun, 18 Apr 2021 09:29:08 +0000 http://www.walkinginthelightblog.com/?p=2543 우리가 스러져갈 꽃으로 태어나고

저물어갈 태양의 운명을 가진 것은

이 세상이 영원한 거처가 아닌

잠시 스쳐 지나가야 할 곳임을 알게 하심이다

어머니의 뱃속이 영원한 거처가 아님으로

비로소 어머니를 보고 만날 수 있는 세계로 이동했듯이,

반드시 이 세상 다음에는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

고통도 슬픔도 없이 우리를 기쁘게 어루만져주실 세계가 있음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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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지는 붉은 해 https://kuw.bis.mybluehost.me/%eb%96%a8%ec%96%b4%ec%a7%80%eb%8a%94-%eb%b6%89%ec%9d%80-%ed%95%b4-2/ Sun, 18 Apr 2021 09:01:52 +0000 http://www.walkinginthelightblog.com/?p=2541 떨어지는 붉은 해

구름 뒤에 가리웠나

찬란했던 빛이 어느새

붉은 핏조각이 되었나

누군가의 애만태우고

어둠으로 향하네

이별의 말도 없이

침몰하는 당신이

잠시 빌딩 숲 속에 숨겨진 것이라면

얼마나 좋은까

찬란한 모습으로

다시 떠올라주는 태양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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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https://kuw.bis.mybluehost.me/%eb%af%bc%eb%93%a4%eb%a0%88/ Sun, 18 Apr 2021 08:55:12 +0000 http://www.walkinginthelightblog.com/?p=2538 구부러진 등으로 길가에 핀 민들레를 찾는 할머니의 주름진 손,

그 할머니 품에 안긴 민들레는

고독한 죽음도 없이

찰나와 같은 영원한 기쁨을 느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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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도 https://kuw.bis.mybluehost.me/%eb%96%a8%ec%96%b4%ec%a7%80%eb%8a%94-%eb%b6%89%ec%9d%80-%ed%95%b4/ Sun, 18 Apr 2021 08:46:01 +0000 http://www.walkinginthelightblog.com/?p=2533 우리의 목숨이 하나님께 달리고

우리를 심판하시지만

우리도

인간도

신을 죽일 수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예수님을 못박고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지우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한낱 미물 같은 나에게도

신을 죽일 수도 있는 칼을

주신 것은

스스로 그 칼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살아 숨쉬는 사랑을 구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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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박탈할 권리 https://kuw.bis.mybluehost.me/%ec%95%84%eb%a6%84%eb%8b%a4%ec%9a%b4-%ec%a3%bd%ec%9d%8c/ Fri, 12 Feb 2021 03:24:39 +0000 http://www.walkinginthelightblog.com/?p=2523 생명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가? 존엄사 혹은 안락사를 둘러싸고 철학적 딜레마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지만, 안락사에 대한 긍정적인 접근이 그 힘을 얻어가고 있는 시대적 흐름은 분명히 감지할 수 있다.

안락사euthanasia그리스 어원은 ‘좋은 죽음’, ‘아름다운 죽음’을 뜻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죽음이란 과연 존재할까? 이미 네덜란드, 벨기에와 같은 서구 진보적인 국가에서는 조력자살, 안락사 모두 합법화되었고 ‘안락사 버스’가 운행되기도 했다. 심지어 벨기에는 나이제한조차 없애 어린이의 안락사도 허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어느새 도덕적 논의보다는 영화 등 감성적 매체를 통해 ‘웰다잉’이라는 개념을 먼저 심어주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최근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자살, 안락사, 임신후기 낙태 등 생명경시 풍조의 사상적 뿌리는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생명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우리의 본능과 양심을 거스르고, 자살을 미화하고 죽음을 선택하게 이끄는 무언의 사상과 문화의 실체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우리의 마음 속 깊은 심리는 무엇일까?

내가 보았던 영화들 중 [미 비포 유], 한국영화 [어느 날] 등에서 그려내고 있는 안락사는 적극적 안락사이다. 남은 자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슬픔으로 고통스러워 하지만,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기꺼이 도움을 주는 조력자가 된다. 감성적인 영상과 남은 이들을 더 사랑하기 위한 죽음의 선택이라는 메시지는 우리의 가슴을 파고 든다. 그러나 그 사랑스러운 선택 속에는 아주 위험하고 잔인한 칼날을 동시에 지니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한다.

안락사를 선택하는 이들. 병들고 연약하고, 나이 든 사람들은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짐이 되는 존재들이라는 아이덴티티를 부여한다. 무서운 것은 이러한 아이덴티티가 사회 속에서 부여받는 것이라는 점이다. 만약 적극적인 안락사가 합법화되고 환자들과 노인들 사이에서 유행한다고 가정해보자. 진정으로 남은 자들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낫다는 시선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연약하고 추하며 고통받는, 모두에게 피해만 안겨주는 자신의 생명을 끝까지 붙들고 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 또한,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자체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광범위한 조력 자살을 부추기지는 않을까? 자살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전문의와 의약품에 의한 쉬운 자살방법으로 비춰진다면?   더 늙고 추하기 전에 자살을 선택한다면? 걷잡을 수 없는 불길처럼 번지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더욱이 의료종사자로서 혹은 보호자로서 양심에 따라 적극적인 안락사에 동의하지 않을 때 법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오히려 그들이 환자의 고통에 눈감는 몰염치한 사람들로 낙인 찍히는 사회가 되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을까?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은 육제척, 정신적인 고통 속에서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고통 없는 육체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어디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더 두려운 것은 다른 사람을 보는 시선이다. 스스로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살 가치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아닌 사람’을 구분하여 보기 시작할 것이고, 우리 사회는 연약하고 어두운 부분에 빛을 비추어 주는 대신 깨끗하게 청소해버리는 것을 선호하게 될지도 모른다. 고통을 죄악시하고 고통에 대한 내성을 잃어버려 쉽게 죽음을 선택하고 장려하는 사회. 그런 사회로 가는 지름길이 되지는 않을까.

‘모두에게 행복과 이익을 가져다 주는 사람’ 그리고 ‘모두에게 고통과 근심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라는 구분은 어쩌면 공리주의 철학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짐작해본다.

제러미 벤담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즉 공리주의적 접근에 의하면 윤리적 기초를 개인의 이익과 쾌락의 추구에 두고, 고통과 쾌락 둘 사이에서 행복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소수의 사람들을 모두의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안락사라는 것은 모두의 고통을 줄이는 매우 도덕적인 결정이라고 평가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진화론적 세계관에서도 안락사는 큰 연결고리를 갖는다. 처음 낙태와 안락사를 주장했던 인물들이 진화론을 지지했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우생학을 옹호했다. 즉 신체장애와 유전적 결함을 가진 ‘열등한’ 사람들을 제거함으로써 인류를 개선한다는 개념이다. 실제로 독일의 진화론자 헤켈은 장애를 갖게 된 성인의 안락사를 선호하기도 했다. 일부 현대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어린 아이와 노인을 비인간으로 취급 해야한다는 주장까지 나왔고, 실제로Covid19 팬데믹 이후 청년과 노인 중 살릴 자와 죽을 자를 결정해야 하는 딜레마 속에서 결국 ‘더’ 살 가치가 있는 청년에 손을 들어주었다는 사실도 똑똑히 경험했다.

진화론은 가치(형이상학)와 물질적 현실(형이하학)을 분리시킨 칸트의 철학, 그리고 만물의 근원을 물질로 보는 유물론을 근간으로 탄생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체계에 따르면 우리의 인격과 육체는 분리될 수 있고, 육체는 물질에 불과하고 모든 것이 물질로 설명될 수 있다. 사상의 흐름은, 대개 과학기술이 그리하듯 잘못된 목적과 의도의 수단이 되기 시작하면 겉잡을 수 없는 파도가 된다.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 생명을 존중하고, 나와 모든 인류를 사랑할 수 있을까? 답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생명이 귀하다는 것은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전제가 되어야 하며, 절대적인 진리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 어떤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잣대로 결코 침범할 수 없게 말이다.

성경적 관점에서는 몸과 영혼으로 이루어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존재이다. 바로 그 자체로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을 닮은 자녀가 된다. 육체와 정신은 따로 떨어질 수도 없고 우위를 정할 수도 없다. 그리고 인간은 수단이 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자체가 ‘목적’이다. 하나님이 성경 속에서 우리를 말할 때 ‘태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알고 사랑하시며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세상의 약한 자들을 택하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천하고 멸시받는 자, 없는 자들을 택하시고 그 어떤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보배를 질그릇에 두듯 우리의 연약함은 하나님의 도움과 사랑을 구하는 통로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세상에서 말하는 쓸모 없고, 비천하고, 연약한 이들을 사랑하시며, 들어 쓰시고, 존재 이유를 세상에 드러내어 그들을 업신여기는 교만한 마음들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것이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시로 사랑을 받은 송명희 시인은 자신의 장애와 육체적 고통으로 절망했지만 자신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아름다운 시로 건강한 육체를 가진 우리들에게 그 누구보다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시인이 되었다. 누군가의 연약함, 고통을 통해 위로 받고 삶을 변화시키는 반전을 우리는 무수히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고통 속에서 죽는 삶이라도 생명의 가치 있음의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지 않을까? 내 생명이 가치 있음으로 비로소 어린 강아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뱃속의 아기, 늙어가시는 부모의 생명이 중요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생生’을 ‘명命’ 받은 존재들이다. 동시에 선물을 받은 자들이다. 수억 분의 일이라는 경쟁을 뚫고 태어나, 사랑으로 성장하고 사랑이신 하나님을 닮아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calling을 받은 존재들이다. 처음 생명을 선택할 권리가 우리에게 없었듯이, 나와 내 이웃의 생명을 박탈할 권리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콘크리트를 뚫고 나온 작은 새싹에서, 죽어 있는 대지에서 봄의 기운으로 싹을 틔우는 무수한 생명에서 경외심을 느끼지 않는가?

안락사의 의도가 그 아무리 순수하다 할지라도, 적극적인 안락사를 조장하고 미화시키는 문화에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마지막을 고통 없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 의료적 연구와 시설, 가족을 위한 사회적인 배려가 먼저 논의되어야 할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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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 Pandemic https://kuw.bis.mybluehost.me/after-pandemic/ Fri, 05 Feb 2021 14:23:08 +0000 http://www.walkinginthelightblog.com/?p=2519 ‘앞으로 10년 내 어쩌면 미국 주도의 자유진보주의에 의한 세계질서는 종언을 맞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바로 소프트파워 이론의 창시자 조셉 나이(Joseph Nye)가 예상하는 팬데믹 이후의 세상이다. 즉 코로나로 인한 대량실업과 경제위기, 불안정한 사회를 빌미로 권위주의 체제가 다시 그 힘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온 국민을 감시체계 아래의 두고 소수인종을 억압하고 있는 중국이 아시아에서 그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바이러스 방역을 구실로 반정부인사를 잡아들이거나 표현,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고 부정선거가 횡행하는 등 민주주의와 인권이 후퇴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이 입을 모은다.

최근 미얀마의 쿠테타 사태는 조셉 나이의 예상에 딱 들어맞는 현실이 되었다. 쿠테타 이후 미얀마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인권탄압문제가 얼마나 더 악화될 지 걱정이 앞선다.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미얀마는 지난 70여년간 군부 통치하에서 벗어나 가까스로 2015년 문민정부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여전히 군부의 힘은 막강했고, 로힝야족에 대한 학살을 묵인하며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그리고 2021년 군부가 쿠테타를 일으켜 아웅산 수치와 대통령 등 NLD당원들을 구금하여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UNHCR에서 근무하는 동안 미얀마의 로힝야 난민문제를 공부하면서, 소수민족과 종교를 탄압하는 군부의 잔혹한 학살을 목격하였다. 주변국들은 70만명이 넘는 난민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음을 공공연하게 밝히며 죽어가는 이들에 눈을 감았다. 인권단체와 난민캠프가 그들을 돕고 있지만 역부족일 뿐이다. 오늘도 그들은 해상에서, 정글에서 기아로, 인신매매로 죽어가고 있다.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는 미얀마 군부는 이번 쿠테타 이후 인권문제에 대한 서방의 목소리에 귀를 닫을 것이고, 로힝야족의 인권문제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북한 탈북자들의 중국 국경에서는 무슨일들이 일어나고 있을까? 강제송환으로 수용소에 구금되고 인신매매를 당하여 중국에서 참혹한 삶을 사는 그들의 인권은 누가 구해줄 것인가? 집단 구금이 자행되는 신장 위구르의 상황은? 팬데믹 이후 세상은 최악의 인권침해가 곳곳에 만연해질 것이라는 것이 음울한 현실이 되었다.

조셉 나이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명예교수는 팬데믹 시대의 소프트파워와 외교문제에 대해 논하며, 권력과 국익의 정의가 전환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권력은 지금까지의 ‘지배하는 권력(Power over Others)’에서 ‘함께하는 권력(Power with Others)’로, 국가의 지도자는 ‘자국의 이익 추구’를 넘어 ‘타국의 이익까지 추구’하는 것으로 포괄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2차세계대전 후 미국이 서유럽에 대한 대외원조계획 마셜플랜(Marshal Plan) 처럼 미국과 유럽 모두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던 사례가 있다. 조셉 나이 교수는 바로 지금 모두가 돕고 협력해야 할 시기라고 주장하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나아가 대외정책 또한 ‘도덕적’이어야 하며 결과 뿐 아니라 의도와 수단 모두가 도덕성에 부합해야 한다고 그의 저서 [Do Morals Matter?] 를 통해 새로운 시대의 권력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밝히고 있다.

나는 그의 이러한 주장에서 팬데믹 이후 우리가 그려야 하는 리더십의 모습이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의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더라도,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 총체적 위기 속에서 희망은 도덕성과 포용성에서부터 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시편 82장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에게 값지게 느껴진다.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팬데믹 이후, 민주주의 후퇴와 최악의 인권위기 사태가 인류를 절망으로 몰아넣기 전에 우리 모두의 가슴에 새겨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내가 큰 권력의 위치에 있지 않더라도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서 연약한 자들을 위한 사랑과 공의를 실천하는 것, 작은 물방울이 모여 큰 바다를 이루듯 거대한 흐름조차 반전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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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의 문제 https://kuw.bis.mybluehost.me/%ec%97%b4%eb%93%b1%ea%b0%90%ec%9d%98-%eb%ac%b8%ec%a0%9c/ Tue, 15 Dec 2020 06:03:57 +0000 http://www.walkinginthelightblog.com/?p=2513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면, 바로 열등감의 문제이다. 신기한 것은, 제 아무리 자기계발서나 노래가사에서 Love yourself, 다른 사람에 신경쓰지 말라, 각종 건강과 능력을 계발하라는 가르침에 따라 감동도 받고 실천도 해보지만 이길 수 없는 늪처럼 열등감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점이다. 본질은 스스로에게 점수를 주고 사랑하는 것인데, 그 것만큼 쉬운일이 없을 것 같은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화상을 그리려면 거울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에게 들려진 거울은 ‘세상의 거울’이다. 이 거울의 모드는 딱 두 가지인데 하나는, 완벽한 타인의 이미지와 초라한 나를 동시에 비추어주는 것, 다른 하나는 순수하고 깨끗하고 상처를 모르는 나와 지금의 추악하고 상처로 얼룩덜룩한 나를 드러내게 해주는 거울이다.


그 거울을 가지고 아무리 내가 아름답다, 내가 소중하다, 나를 사랑해야한다 아무리 최면을 걸어보았자, 차라리 거울을 보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 버린다. 추한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다른 멋진 것을 동경하고 열광하며 나를 잊고 살고 싶다. 그러나 늘 내 우울과 슬픔의 끝에는 열등감이 문제라고 하는데, 나는 도대체 이 것을 어떻게 극복해야하는지 알 수 없다…


성경은, 우리가 거울을 보기 전에 해야할 일이 있다고 가르쳐준다. 내 안의 탐욕과 거짓, 비방, 위선, 가면이라는 죄를 벗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이다.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 앞에 우리의 죄를 내어놓고 회개하는 것이다. 그 후에 우리에게는 세상 전체가 달리 보일 것이다. 용서받은 자, 사랑에 빚진 자로서 나의 신분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변해있을 것이다.


이 때에 비로소 우리가 온전히 거울을 볼 수 있다. 나도 모르게 깊숙히 숨겨졌던 죄의식과 그로 인해 나를 사랑할 수 없었던 과거가 물러나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를 볼 수 있게 된다. 눈빛, 말소리, 표정 모두 사랑받고 있는 사람은 아름다울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나를 비추는 거울보다는, 나와 동일하게 사랑받는 주변사람들을 비추는 거울로 시선이 갈 것이다. 창조주의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나도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먼저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잊고 산다. 세상적 논리와는 반대이다.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통해 나 자신의 상처를 깨닫고. 다른 사람의 아픈 곳을 어루만지며 내 안의 깊은 상처도 회복된다. 회복은 단순히 아무것도 없었던 처음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상처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깊은 위로와 사랑을 깨닫고 같은 사랑을 이웃에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진정한 회복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시선을 깨달을 때, 창조주께서 아끼는 소중한 존재들임을 깨닫고 나 자신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사랑은 한계가 있다. 나를 사랑하는 힘도, 이웃을 사랑하는 힘도 한정되어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도록 축복의 통로로서의 나의 신분을 바꾸어 주신다. 단순한 감정적 사랑이 아닌 의지적 사랑, 아가페적 사랑이 나를 통해 흘러갈 수 있도록 쏟아주신다. 사랑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닌 죄인에 대한 사랑이라면 몇 배나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하고 그 사랑을 다 보충해 주신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그 사랑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가끔은 세상의 거울을 들고 주눅들지 말자. 줄 수 있는 것이 더 많은 사람이 주눅들 이유가 없다. 우리는 사랑도, 용서도, 은혜도, 행복도, 구원도, 영생도 받았다. 더 줄 수 있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다.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한다. 바울의 고백처럼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자이다.


”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린도후서 6장 8-10)


하나님이 주시는 거울을 받자. 나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해야할 빚진 자들을 비추고 그들을 사랑해주어야겠다고 느끼는 그 거울이야말로 진정한 나를 보는 길이요, 나를 사랑하게 하는 거울이며, 열등감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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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선택사이 https://kuw.bis.mybluehost.me/%ec%9a%95%eb%a7%9d%ea%b3%bc-%ec%84%a0%ed%83%9d%ec%82%ac%ec%9d%b4/ Tue, 15 Dec 2020 06:00:18 +0000 http://www.walkinginthelightblog.com/?p=2510 욕망은 더 이상 부끄러운 것이 아닌 시대에 살고 있다. 욕망은 다양한 이름으로 세분화되고 세련된 선택으로 변모하였다. 자신이 원하는 향기, 커피 종류, 스테이크 굽기정도 등은 그 사람의 아이덴티티를 규명해주는 세련된 도구이고, 온갖 다양한 상품들은 나의 독특한 취향과 차별화된 선택을 부추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제는 이성(異性)이 아닌 동성(同性)을 파트너로 선택하고, 태어날 아이의 권리보다 여성의 권리를 선택하고, 정자은행에서 기증받아 홀로 아이를 임신하기를 선택한다. 이러한 개개인의 다양한 욕망은 ‘선택’으로 존중하고 그 것을 지지하는 것이 옳고 쿨한 사회가 되었다. 사회 각계각층의 다양한 의견들이 모아지기도 전에 더이상 도덕적 잣대가 선택을 방해할 수 없도록 다양한 법률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 선택이 옳은 것인가보다는 그 선택을 반대하는 것이 옳은가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방송인 사유리가 정자를 기증받아 자발적으로 비혼모가 되었다는 것이 세간에 화제가 되었다. 그녀는 우리 사회에 이러한 질문을 던졌다. ‘비혼모는 아기 가질 권리는 없나요?’ 사실 이러한 것은 동성커플이 아이를 입양하거나 대리모를 통해 아이를 가질 권리 등과 함께 인간의 존엄성과 연결된 윤리도덕적 문제이지, 개인의 선택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부모가 되는 일은 한 생명을 잉태하여 전 인격적인 성장을 책임지는 일이다. 사유리의 선택에 대해 가장 영향을 받는 사람은 태어난 아이이다. 그 아이가 정자의 매매를 통해 잉태되었다는 것을 아는 순간 정체성의 혼란을 겪에될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생명의 잉태에 관여하는 부부의 연합된 사랑이 결여된 자신의 시작을 이해할 수 있을까? 자신을 사랑해주는 친부가 부재하는 것에서 나아가 자신의 친부가 어떤 사람인지도 원천적으로 알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사유리가 아무리 자신의 선택에 당당하다 할지라도 이러한 걱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말이다.


아이를 키우다보면 한 순간 한 순간을 사랑으로 채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하루씩 사랑을 먹고 아이는 성장한다. 모유수유를 할 때까지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으로 행복과 사랑을 느끼며 엄청난 에너지를 조달한다. 하지만 호르몬 이후에는 자신의 인격과 남편의 사랑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야 한다. 결혼생활을 통해 먼저 공동체를 이루고 희생하고 사랑하는 인격이 성숙해야 한다. 결혼생활은 싫고 아이만 좋다고 하는 발언에는 어쩐지 아이를 키우는데 필요한 자기희생과 책임, 인격의 성숙 대해 간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혼가정도 있고 부모와 사별하거나 부모가 학대하는 다양한 가정들 속에서도 고난을 딛고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날 힘이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다. 그러므로 결국에는 10년전 같은 선택을 했던 방송인 허수경처럼 그 속에서 인내와 지혜로 잘 키워내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 아이가 자랐을 때, 자신과 같은 선택을 해도 좋다라고 확신으로 말할 수 있을 때에만, 그 선택이 자신의 욕심이 아니라고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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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회복이 가능한가? https://kuw.bis.mybluehost.me/%ea%b0%80%ec%a0%95%ec%9d%98-%ed%9a%8c%eb%b3%b5%ec%9d%b4-%ea%b0%80%eb%8a%a5%ed%95%9c%ea%b0%80/ Tue, 15 Dec 2020 05:57:49 +0000 http://www.walkinginthelightblog.com/?p=2507 평탄하고 화목하기만 한 가정이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 모두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위로받고 사랑받아야 할 가정에서 깨지고 부서지고, 상처받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정에 다시 희망을 두는 것은, 모두의 첫 공동체요 회복의 열쇠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혼생활이 신혼의 정점에서 내리막길을 걷는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태어나고 웃음이 가득했던 순간들을 회상하며, 그 때가 좋았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는 모든 관계에서 처음 사랑의 회복을 추구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상처받은 곳이 아물고, 예전의 좋은 감정이 살아나는 회복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것조차 힘들 때가 많다. 깨어진 가정이 다시 회복되는 것은 불가능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가정들도, 회복 불가능한 가정들이다. 첫 인류인 아담과 하와의 맏아들 가인은 질투로 동생 아벨을 살해한다. 이삭의 아들 야곱은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도망하여 가정이 흩어지고 깨어진다. 야곱의 아들들은 디나의 복수를 위해 성의 모든 남자들을 살해하고, 그 중 맏아들은 아버지의 첩을 범한다. 유다라는 아들은 며느리 다말이 창녀로 둔갑하여 그의 아들을 얻는다. 그리고 다른 형제들과 동생 요셉을 이집트의 노예로 팔아버리는 죄를 저지른다.


이러한 가정이 회복될 수 있을까? 막막하기만 한 이 가정들을 하나님은 인내하시며 죄악의 결과를 파멸이 아닌, 선으로 바꾸어 주시며 복을 주신다. 아담과 하와에게 셋이라는 아들을 주시고 다시 회복하여주신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 용서를 받고 관계가 회복된다. 야곱의 아들들은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에게 용서를 받고 가정이 회복된다. 다말의 아들 베레스는 이후 다윗의 선조가 된다. 이렇게 하나님은 가정을 끝까지 지켜내기를 기다리시고, 기꺼이 회복을 도와주신다.


요셉이 이집트의 노예로 팔려가 온갖 고난을 다 당하였지만, 결국 그 일을 통하여 가뭄으로 죽을 고비를 맞은 가족과 민족을 살려낼 수 있었고, 형들의 죄조차 선으로 바꾸어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믿고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용서도 사랑도 행복도 모두 회복되어 있을 것이다.


어느 목사님은 회복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회복은 예전의 완벽한 상태로 돌아가는 과거지향이 아닙니다. 지금의 불행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인내하고 기다려주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그 분의 온전한 뜻을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진정한 회복입니다. “


탈무드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랍비가운데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아카바가 여행을 하고 있었다.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리자 아카바는 마을 어귀에 있는 아무도 살지 않는 오두막집 한 체를 발견하고 그곳에 묵기로 했다. 그는 당나귀와 개를 오두막 앞에 매어두고 방안에 잠자리를 마련했다. 잠이 오지 않아 램프를 켜고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얼마 후 바람이 불어와 램프가 꺼졌고 그는 하는 수 없이 책 읽기를 단념하고 잠을 청했다.
아침이 되어 일어나 보니 오두막집 앞에 매어 둔 개와 당나귀가 죽어 있었다. 간밤에 굶주린 사자가 잡아먹은 것이었다. 그는 램프를 들고 홀로 터덕터덕 여행을 계속했다.


얼마 후 마을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마을은 전날 밤 도둑들이 모두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모두 죽여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간밤에 램프가 꺼지지 않았다면 그는 계속 책을 읽었을 것이고, 당연히 도둑에게 발각되었을 것이다. 또한 개가 살아 있었다면 개 짖는 소리에 도둑들이 쳐들어 왔을 것이고, 당나귀도 시끄럽게 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것을 잃은 덕분에 가장 소중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로마서 8장에서 말씀하신다. 우리의 관점에서는 실패하는 것 같고, 고통인 것 같고, 좌절인 것 같아 보이나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고 반드시 그 분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세심한 계획과 섭리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다. 분명 우리 가정에 찾아온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질지라도, 이 고통의 끝에는 분명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있을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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