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세계대전 이후 풍요로워진 유럽에서 ‘금지함을 금지하라(Il est interdit d’interdire)’, ‘구속 없는 삶을 즐겨라’ 의 구호로 전통적 진리와 가치체계, 권위, 정치체계 등에 반대하는 68혁명이 일어났다. 당시 차세대 철학자 자크 데리다 등은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저항하였고 ‘해체주의’가 시작되었다. 그가 주장한 해체주의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식의 변혁을 통한 지배체제의 해체이며, 가시적인 대상 뿐아니라 불가시적인 투쟁대상도 찾아 붕괴시킬 수 있는 저항이론이었다. 해체주의는 진리의 상대성을 표방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연장선이며, 현재 우리사회의 체제, 집단, 세대간 극심한 갈등의 뿌리깊은 사상적 흐름을 주도하고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우리사회의 키워드 중 하나는 바로 ‘탈권위’ 시대이다. 이는 강력한 권력으로부터의 종속을 거부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는 사회로 이동한 18세기 근대역사 이후 지속되어 온 결과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탈권위의 흐름은 인터넷의 기술발달로 인해 전지구적으로 급속하게 퍼져나가고 있으며, 그 해체의 대상 또한 다변화되고 있다. 적폐, 갑질문화, 꼰대, 혐오에 대한 사회적인 질타가 확산되는 것도 사실 전통적인 영향력을 가진 집단이나 가치를 거부하고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고자 하는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손 안의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감시하고 권위를 가진 자들의 두 얼굴을 고발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 대통령, 검사, 판사, 의사, 교수, 교사, 목사, 지식인, 기성세대 심지어 아버지의 권위까지 상실되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목격하고 경험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권위에서 벗어나려고 하는가?
권위는 본래 ‘원제작자’라는 의미를 지닌 라틴어 auctor에 바탕을 두고 있다. 권위 자체는 일방적으로 명령하고 지배하는 것과 구별되는, 상대방으로부터의 용인이 없이 성립될 수 없는 속성을 지닌다. 하지만 역사속에서 권력을 권위로 기만하는 무수한 사례들로 인하여 우리는 그 경계를 불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강압적 태도와 부당한 권력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과 상처가 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 스스로 권위자체를 부정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 우리가 해체하고 붕괴시켜야하는 것은 권위가 아니라 권위주의이다. 권위에 의혹을 품거나 저항하는 것을 죄악시하는 강압적인 태도 말이다.
권위가 사라진 사회는 무질서한 사회로 가는 지름길이다. 교사가 권위를 잃은 교실, 의사가 권위를 잃는 수술실, 판사가 권위를 잃은 법정, 군간부가 권위를 잃어버린 군대, 목사가 권위를 잃은 예배, 가장이 권위를 잃은 가정, 우리는 그 곳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 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권위는 어원처럼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이룩해낸 노력의 결과로 자신이 아닌 상대방으로부터 얻은 인정이다.
만약 권위가 꼭 없어져야하는 대상이라면, 왜 우리사회에 단 한마디 말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오피니언리더, 소셜미디어 인플루엔서, 인기인들은 변함없이 해체의 대상이 되지 않는가? 권위는 나쁘고 영향력과 인기는 선한 것인가? 말의 변용(變容)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지해야한다.
전문영역 종사나 상당한 권력을 동반하는 권위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상사로서, 선배로서, 연장자로서, 부모로서 일상생활에서 크고 작은 권위를 가지거나 인정해주기도 하면서 사회를 구성해 나간다. 권위자체를 죄악시하여 다른 이의 권위를 끌어내리고자 한다면 내가 가진 권위역시 상납해주어야 하는 것이 이치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수평적 관계에서의 소통이지 무조건적인 권위와 질서의 붕괴가 아니다.
이제는 권위의 해체가 아닌 진정한 권위를 회복하는 것에 집중해야 하는 시대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대화와 소통을 통해 끊임없는 자기성찰이 필요한 것이 권위의 자리이다. 그리고 인격과 품격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조건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즉 개인의 도덕성과 불변의 가치체계를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해체주의는 바로 이러한 가치체계 자체를 해체시키고자 한다. 권위도, 도덕도, 나를 지배하는 모든 구조를 말이다. 이 세상 모두가 내가 보고자 하고 듣고자 하는 것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야말로, 세상은 ‘나를 위해 돈다’와 같이 논리와 이성에 눈을 감는 또다른 천동설로의 회귀인 것이다.
해체주의의 궁극적인 도달점은 바로 자기해체이다. 자기마저 해체되어야 할 대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마치 여성차별과 싸우기 위해 성을 해체시켜버리듯. 살기위해 자신을 해체하는 처참한 역설인 것이다.
해방. 그것이 해체주의의 목마름의 본질이다. 우리를 억압하는 것을 손꼽아 세어보라고 하면 한이 없을 것이다. 때로는 자기 자신의 욕심조차 자신을 옭아매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대상을 찾고 찾아 없애려고 하면, 결국 나 자신이 소멸되는 비극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사유는 어떻게 보면 성경에서 말하는 구속함, 즉 진정한 해방이 필요한 인간의 본질적 속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주님의 보혈로 대속함을 받은 우리들이 비로소 죄로부터 해방되는 진정한 평강을 얻듯이… 우리가 진정으로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성취하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일 수 밖에 없다. 해방에 대한 답은 구속(救贖, redemption)에 있다. 잃어버린 것을 값을 지불하고 도로 찾는다는 뜻의 구속은, 우리의 영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찾으시는 창조주의 사랑이다. 그 구속함으로 인해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것이다.
우리같은 죄인을 죽기까지 섬기시며 용서하시며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 세상에서 나를 옭아매는 모든 억압과 미움, 죄의 노예된 삶에서 비로소 자유할 수 있다. 내 시선이 더 이상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영혼의 구원, 천국의 소망으로 옮겨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됨을 선택함으로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각기 다른 능력과 달란트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 신분을 뛰어넘어 서로 높여주고 도우며 사랑하는 조화로운 삶은 오직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실현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라디아서 3:28)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로마서 12:4-8)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로마서 12:18)
분노의 대상을 찾고 미움을 에너지의 원천으로 삼는 해체주의를 거부하고, 무너진 가치들을 다시 세우자.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해방과 자유함을 만끽할 수 있는 너와, 내가 함께 사는 길이다.